Monday, 8 December 2008

a group of people with no law in south korea

yes, they are lawless with no censorship nor any sort of authority, working for government.  can you imagine a country with no law, and/or its people with no law?  it would be real tough and real hard to get over with public money or something of that sort.  so this is just a reminder for all who want to know and why it should take so long...

Sunday, 23 November 2008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님 인터넷 설교중 공부에 관한 말씀...

설교자: 김지철교수님
성경말씀: 마 4,1-11
2002/12/15(일)

 인생은 투쟁이다. 

인생은 투쟁이다.
마 4,1-11
                                                                                          김 지 철교수님 (장신대)
공자는 논어의 {위정편}에서 자기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살에 학문에 뜻을 세우고(지학), 30살에 독립적인 인생이 되었고(이립), 40살에 불혹이고, 50살에 지천명이고, 60살에 이순이라고 했으며, 70살에 마음내키는대로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종심불유거)라고 말합니다. 중학교 때에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30살 이전에 확고한 사람이 되고 불혹의 나이(미혹됨이 없고 흔들림이 없다)도 공자보다 앞당길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나의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공자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인생이란 이렇게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인생이란 언제나 미혹받는 현장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란 철저한 자기 내면적인 투쟁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치열한 싸움의 장이 곧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을 돌아보면, 그분에게 있어서 공생애의 시작도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나가는 투쟁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3년의 기간도, 더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시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처절한 고뇌의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한 치열한 내적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투쟁의 모습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도, 청년의 때도, 신학을 한다고 이 동산에 올라왔을 때에도, 그리고 교회현장에 나가서도 그러합니다. 사실 이러한 투쟁이 끝나는 날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살아나갈 때에 투쟁적으로 사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I.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공적인 생애를 출발하려는 예수님께서 처음 접한 것은 사탄과의 영적 투쟁의 자리였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칭함받은 예수님이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나갔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성령이 주어로 나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내쫓았다(예: 귀신을 내쫓다)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몰아갑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령의 경험은 그를 황홀한 천국의 자리에 이끌어 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땅의 자리, 외롭고 고독한 자리로 내 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하여금 홀로 있음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삶의 고독한 자리로 나아가게 강요합니다. 이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금식하면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홀로 있을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자기를 바르게 세울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의 홀로 있음은 특히 신앙적인 고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 32장: 야곱의 홀로있음). 이는 기도하는 고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능력은 이 고독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홀로 있을 때에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홀로 있음이란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 자기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정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뜻합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의 인생 길을 정해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인생의 배를 이끌어 줄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다음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는 요구가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하나는 사탄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세속적 부와 명예와 자랑에 네 인생 모든 것을 걸라는 유혹입니다. 그것을 향해 달려가라는 강력한 유혹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직 성령을 통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초청이 들려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섬기라.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라는 요청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광야는 똑같은 것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스스로가 철저한 단독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 광야를 보냈습니까? 모든 가능성이 단절된 곳에서 그들은 다시금 종되었던 애굽 땅을 그리워합니다. 먹고 마실 것을 불평하면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광야를 건너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삶의 여건이 단절된 불모지/ 더 이상 생의 가능성이 끊어진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과 도움을 맛볼 수 있는 은혜의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신 8,15-16: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시 78,15에서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예수님에게 있어서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그분에게서도 굶주림과 헐벗음과 외로운 삶의 자리였습니다. 곧 모든 삶이 정지된 불모지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 오직 하나님에게만 자신을 드리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외롭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담대하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길을 갈 수 있는가를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II. 광야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교묘할뿐만 아니라, 끈덕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혹이 세 번씩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그 유혹이 얼마나 철저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사탄의 유혹 방법은 어떠할까요?
   1) 예수님의 자의식을 이용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3.6 절). 인간 실존의 근거와 뿌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네게 하나님의 아들의 가능성과 현실성이 있는가? 너는 혹 허울뿐인 존재는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2) 인간 예수의 기본적 욕망을 부추킵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에 실제로 먹는 것,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뽐내고 인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느냐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없이도 인생을 괜찮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호기를 부추키고 있습니다.
2. 사탄의 유혹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1) 인간론의 왜곡입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가장 인간적인 본질이 들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 8,3)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는 떡과 음료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규정되는 거룩한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저 목마름과 배고품은 생수이시고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채워진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게 먹고 마셔도, 그렇게 돈을 벌어도, 그렇게 명예와 세상의 쾌락을 추구해도, 인간 영혼 깊은 속에 타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사이는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성의 자유로운 담론화가 진행되면서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 성적접촉을 최우선적 가치관으로 삼는 흐름이 만연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조선일보에서 "사라(마광수)와 뽀리(박광수)"가 만나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 교수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가입니다. 전자는 성을 인간 본연의 최우선적 가치관으로, 후자는 성보다 앞서 있는 사랑과 이해를 최우선적 과제로 언급합니다. 오늘날 이 두가지의 세계관은 엄청나게 부딪치는 가치관의 충돌일른지도 모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사이에서 성관계가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물질과 성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스릴 하나님의 말씀이야마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첩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세계관의 왜곡이며 동시에 신앙관의 왜곡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을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그것은 바로 인기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라/ 기복주의적 세계관을 가지라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기 인기와 명예를 높이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한번 매직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새처럼 사쁜히 땅에 내려 앉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환호를 받으라는 유혹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매직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매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기적은 매직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기적은 매직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존중하지만 매직을 거부합니다.
- 예수님은 인기를 위해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자리에는 늘 인간의 고난과 고통, 아픔이 들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나병환자를 고칠 때, 바다의 폭풍을 잔잔히 하실 때가 모두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합니다. 예수의 기적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매직을 요구하는 사탄에 대해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한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를 인용하는 예수님을 향해 사탄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유혹합니다.
여기서 말씀과 말씀이 부딪칩니다. 어떤 것이 옳은 말씀입니까? 여기에 해석학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명기서가 사탄이 인용한 시편보다 더 위대한 말씀이라는 뜻입니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자주의적인 성서읽기는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의 본질을 해석학적으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악용합니다. 사탄의 오해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인간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오해합니다. 신앙을 매직으로 저락시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매직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되는 분이 아님을 천명하십니다.
  3) 신론의 왜곡입니다:
사탄은 천한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에게 전적인 가치를 두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 역사의 주, 구원의 주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생은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탄은 보는 것에 미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위대함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신학에 너의 삶의 기초를 세우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경배받을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자유를 선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에 대해서도 자유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신성을 갖고 우리의 인격을 굴복시킬 대상은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듣자
11 절: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드니라.
놀랍게도 마가복음 1,13에서는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담과 하와가 지닌 첫 낙원에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III.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이기심으로 아담의 실패가 극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첫 인간 아담의 실패에 대한 엄청난 안티데제입니다.
아담은 에덴의 풍요에서 유혹에 실패했으나, 예수는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첫 인간의 유혹의 질문: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
둘째 인간의 유혹의 질문: 배고품/인기/영광의 유혹
첫 인간의 응답: 말씀에 대한 왜곡과 불순종
둘째 인간의 응답: 말씀에 대한 증거와 순종
첫 인간의 결과: 죄와 죽음과 고통/ 둘째 인간의 결과: 용서와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
예수님이 아담의 실패를 성공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아담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예수님의 승리와 순종과 생명을 지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면, 그렇다면 시험이 없는 곳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인생에 유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대담하게 부딪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하나의 광야와도 같습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앞에 서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사탄에게 유혹받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양자가 우리 앞에 병존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 할 것은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승리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자리에서 이제는 빛과 생명의 자리에로 나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동행하십니다. 예수와 동행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케 하신 것처럼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 모두의 승리입니다. (김 지 철: 장신대채플 2001년 10월 31일)

Tuesday, 18 November 2008

내가 사는 이유 그 하나

첫째, 조그만 집에서 작은 방에서 작은 그 모든 것을 다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총 지식을 동원해서 "작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아는 모든 "크다"라는 말의 반댓말일 뿐이다.  아직은 "작은 XXX"이지만 언젠가는 "큰 XXX"이 될 것 같다고 기도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둘 중의 하나로 만들어 본다.

둘째, "많다"와 "적다"는 첫번째에서 대조어로 "작다"와 "크다"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현재는 "적은 XXX"으로 언젠가는 "많은 XXX"을 성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루 하루가 지나간다.  이 수도 없이 많은 나날은 1년, 2년, 3년,...등등이 지나고 언젠가는 내 생애 모두를 다 합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계산하는 시간은 그 중 아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하찮은 시간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성패가 모두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될 수록 나의 삶은 더욱더 그 값어치를 헤아리기 평이해 질 것이다.

셋째, "젊다"와 "늙다"는 첫번째와 두번째에서 논한 관계 정의법과는 사뭇 다른 방법이 필요할 듯 하다.  여기에서는 단지 그 속도가 "빠르다" 혹은 "느리다"라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평범한 지식과 생각이 모두가 사용될 수 있다.  그 정도가 "많고" 혹은 "적고", 또는 "작고" 혹은 "크고", 또는 "짧고" 혹은 "길고"...  구불 구불 고갯길을 작은 발로 걷기 시작해서 그 끝에 도달했을 무렵 나의 삶은 더욱더 밝고 건강해지고 고요하고 평안해 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나의 현재의 삶의 주소는 바로 내 안의 영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소중한 순간 순간이라고 생각이 되며 이 모든 값진 노력의 결과는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Thursday, 23 October 2008

A Coffee and Donuts

커피와 도넛은 요즈음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신선한 커피콩은 갓 구워낸 듯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으뜸이며 오븐에서 따끈따끈하게 구워져 나온 도너츠는 매우 맛있고 영양가가 많은 좋은 간식이며 식사대용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식탁의 메뉴가 더욱 다양해 지기를 기원하며 오늘은 커피와 도너츠를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크리스피 크림 도너츠가 무척 큰 대형 커피, 도너츠 매장으로 한국에서 미국의 던킨 도너츠와 함께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Wednesday, 22 October 2008

말, 말, 말...

언어는 삶의 중요한 중심이 되어 사람들은 말로 인생을 설계한다.  주변 사람들, 환경,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주요 사건과 전환점,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며 쉴새없이 돌아가는 시계의 수래바퀴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 온 언어는 그 역사를 인류사와 같이 하였다.  한때는 낡고 오래되어 보존이 어려운 흙, 파피루스, 나뭇잎, 종이 등으로 기록되고 만들어져 왔던 말은 어느새 그 큰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흘러 흘러 와서 21세기 현재에는 반영구적, 혹은 영구적으로 기계와 천연재료, 그리고 그 주 원천인 인간의 몸과 마음 모두를 통 틀어서 보다 더욱 많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로는 인간의 언어는 더이상 그 출발점을 단순화된 인간의 언어중추에서만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보다 폭넓게 허용된 지식인의 네트워크와 포럼 및 지식 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한 대학 및 전세계적으로 그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보다 큰 효과를 가져오는 인간 세계의 주요 커뮤니케이션 센터에서 인간의 언어는 단순한 전달 도구로서 이를 사용하고 끊임없이 재평가, 분석, 확인으로 설계도를 바꾸어 가는 인간의 가슴과 마음 저 한편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중추로 더욱 많은 사물과 주변 환경에서 그 가치를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모두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은 언어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의 몫인 듯 하다.  한때는 사람의 머리만 언어의 중추로 기계를 붙여서 머리에서 나오는 뇌파와 호르몬의 이동만으로 사람의 생명과 언어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한 개개인의 행동과 행태, 심리 상태의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관찰, 분석, 평가로만 인간의 언어와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 보존하는 일은 그다지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지 않은 듯 하다.  단순히 누가 어떤 내용의 말을 하고 이러한 말을 듣고 또한 누가 어떤 내용의 답을 하는 등등의 예전 방식을 이용한 정보사업과 지식사업은 그다지 그 효과를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이 복권집에서 복권 한 장을 사서 그 당첨 여부를 확인하려고 한다.  복권을 사고 당첨을 점치는 행위 자체는 예전과 지금은 그다지 차이가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A는 그가 한 행위 그 액면의 값어치를 떠나서 그의 미래와 비전 사업을 스스로 설계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예전에 A는 단순히 복권을 사던 고객이자 소비자였지만 오늘날 A는 복권에 투자를 하는 개인 투자자도 되었으며 그 복권을 파는 회사의 주식도 사고 시장과 산업 전반에 걸쳐 그의 한 표를 과감히 행사하는 보다 민주적이고 주체적인 지역 사회의 주인공으로 다시 그 부활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경제학 적이고 사회학 적이며 역사, 정치학, 법학 등등의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탄생한 그 모든 지적인 행위와 네트워크의 흐름은 이제는 더이상 개별적인 독립된 학문으로서만으로 인정을 받지를 못한다.  이를 보다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사고로 스스로의 삶을 자유스럽게 설계하는 개개인의 역할과 책임이 무척 더 가치있는 사업이 되었다.  쌍방향 및 멀티 채널 구축 및 주변의 모든 사물과 환경을 하나로 통폐합 할 수 있는 단일 시스템 구축만을 오늘날의 미디어와 네트워크라고 정의 내리는 오늘날의 일부 사람들의 언어는 더이상은 호소력이 있지 않은 듯 하다.  젊음,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단력 있고 독창적이며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건강한 젊은이가 그 근간이 되어 보다 많은 결실이 맺어지길 기원하는 바이다.

Drinking an Iced Raspberry Mocha At Hollys--

커피는 내가 좋아하는 음료이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끼의 식사와 오후의 커피 한 잔은 내가 아는 식단 전부이다.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커피는 향이 좋고 약간의 과일의 맛과 향이 있으며 달지 않고 부드러운 모카 커피이다.  시원한 아이스 래즈베리 모카는 내가 찾는 단골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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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18 October 2008

La Vita Bella A La Ja-Yoon Choi Inc (I)

내가 도착한 곳은 작고 어두운 어느 골목 길.  그 곳에서 나의 유일한 벗은 하늘과 땅, 그리고 마음속에 묻어놓은 작은 은행잎.  아기 나무가 몸속에서 뿌리를 내려서 어느새 나는 한 그루의 작고 어린 나무로 다시 태어났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때까지 나의 가슴은 작은 잎사귀들의 속삭임과 흔들리는 바람의 소리로 하루 종일 조용할 수가 없다.  내가 가는 곳곳마다 그리고 마침내 인적 드문 그 작은 길에서 우두커니 홀로 서서 작은 떨림과 소용돌이를 잠재워 본다.  나는 많은 이들의 애환어린 시선과 간절한 소망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들 속에서 그들의 아픔을 같이 해 보기도 한다.  내가 가는 곳과 내가 머무는 자리마다 이들의 작은 발자국들이 하나, 둘씩 점점 늘어나며 내 가슴 속에 커가는 작은 한 그루의 나무의 나이테의 숫자처럼 내게 큰 위안이자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많은 즐거움으로 어느새 내게 끊이지 않는 그림속의 새로운 주인공들로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내가 도달하는 작은 길과 내가 쉬고 있는 가슴속의 작은 아기나무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지만 이러한 작은 인생의 한 뒤 편에서 쉴새없이 돌아가는 작은 나침반과 시계의 태엽소리는 나의 앞길을 끊임없이 밝혀주는 한 줄기의 빛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무척 많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많은 고통이 따라와서 무척이나 힘든 인생으로 삶의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웠으나 이제는 나이가 점점 늘어가면서 생기는 삶의 지혜와 나만의 시각, 안목이 더욱더 내게 중요하게 자리매김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인생의 그 첫번째 이야기는 이러하다.  내가 처음 이 세상에서 숨을 쉬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의 몸과 영혼은 나의 인생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두번째의 인생의 첫 테이프를 막 끊게 되었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보다 더 많이 살기 위해서 내가 준비해야 하는 일은 무척 많다.  또한 소중한 생명을 누구보다도 더욱더 잘 가꾸며 살기 위해서 나는 하루 하루 다짐을 새롭게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