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김지철교수님
성경말씀: 마 4,1-11
2002/12/15(일)
인생은 투쟁이다.
인생은 투쟁이다.
마 4,1-11
김 지 철교수님 (장신대)
공자는 논어의 {위정편}에서 자기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살에 학문에 뜻을 세우고(지학), 30살에 독립적인 인생이 되었고(이립), 40살에 불혹이고, 50살에 지천명이고, 60살에 이순이라고 했으며, 70살에 마음내키는대로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종심불유거)라고 말합니다. 중학교 때에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30살 이전에 확고한 사람이 되고 불혹의 나이(미혹됨이 없고 흔들림이 없다)도 공자보다 앞당길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나의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공자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인생이란 이렇게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인생이란 언제나 미혹받는 현장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란 철저한 자기 내면적인 투쟁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치열한 싸움의 장이 곧 인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을 돌아보면, 그분에게 있어서 공생애의 시작도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나가는 투쟁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3년의 기간도, 더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시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처절한 고뇌의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한 치열한 내적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투쟁의 모습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도, 청년의 때도, 신학을 한다고 이 동산에 올라왔을 때에도, 그리고 교회현장에 나가서도 그러합니다. 사실 이러한 투쟁이 끝나는 날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살아나갈 때에 투쟁적으로 사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I.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공적인 생애를 출발하려는 예수님께서 처음 접한 것은 사탄과의 영적 투쟁의 자리였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칭함받은 예수님이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나갔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성령이 주어로 나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내쫓았다(예: 귀신을 내쫓다)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작정하시고 예수님을 몰아갑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령의 경험은 그를 황홀한 천국의 자리에 이끌어 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땅의 자리, 외롭고 고독한 자리로 내 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로 하여금 홀로 있음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삶의 고독한 자리로 나아가게 강요합니다. 이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금식하면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홀로 있을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자기를 바르게 세울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의 홀로 있음은 특히 신앙적인 고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 32장: 야곱의 홀로있음). 이는 기도하는 고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능력은 이 고독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홀로 있을 때에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홀로 있음이란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 자기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정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뜻합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의 인생 길을 정해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인생의 배를 이끌어 줄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다음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는 요구가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하나는 사탄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세속적 부와 명예와 자랑에 네 인생 모든 것을 걸라는 유혹입니다. 그것을 향해 달려가라는 강력한 유혹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직 성령을 통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초청이 들려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섬기라.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라는 요청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광야는 똑같은 것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스스로가 철저한 단독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 광야를 보냈습니까? 모든 가능성이 단절된 곳에서 그들은 다시금 종되었던 애굽 땅을 그리워합니다. 먹고 마실 것을 불평하면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광야를 건너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삶의 여건이 단절된 불모지/ 더 이상 생의 가능성이 끊어진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과 도움을 맛볼 수 있는 은혜의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신 8,15-16: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시 78,15에서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예수님에게 있어서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그분에게서도 굶주림과 헐벗음과 외로운 삶의 자리였습니다. 곧 모든 삶이 정지된 불모지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리, 오직 하나님에게만 자신을 드리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외롭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담대하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길을 갈 수 있는가를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II. 광야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교묘할뿐만 아니라, 끈덕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혹이 세 번씩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그 유혹이 얼마나 철저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사탄의 유혹 방법은 어떠할까요?
1) 예수님의 자의식을 이용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3.6 절). 인간 실존의 근거와 뿌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네게 하나님의 아들의 가능성과 현실성이 있는가? 너는 혹 허울뿐인 존재는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2) 인간 예수의 기본적 욕망을 부추킵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에 실제로 먹는 것,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뽐내고 인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느냐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없이도 인생을 괜찮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호기를 부추키고 있습니다.
2. 사탄의 유혹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1) 인간론의 왜곡입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가장 인간적인 본질이 들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 8,3)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는 떡과 음료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규정되는 거룩한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저 목마름과 배고품은 생수이시고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채워진다는 선언입니다. 그렇게 먹고 마셔도, 그렇게 돈을 벌어도, 그렇게 명예와 세상의 쾌락을 추구해도, 인간 영혼 깊은 속에 타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사이는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성의 자유로운 담론화가 진행되면서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 성적접촉을 최우선적 가치관으로 삼는 흐름이 만연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조선일보에서 "사라(마광수)와 뽀리(박광수)"가 만나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학 교수이고, 다른 하나는 만화가입니다. 전자는 성을 인간 본연의 최우선적 가치관으로, 후자는 성보다 앞서 있는 사랑과 이해를 최우선적 과제로 언급합니다. 오늘날 이 두가지의 세계관은 엄청나게 부딪치는 가치관의 충돌일른지도 모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사이에서 성관계가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물질과 성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스릴 하나님의 말씀이야마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첩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세계관의 왜곡이며 동시에 신앙관의 왜곡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을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그것은 바로 인기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라/ 기복주의적 세계관을 가지라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기 인기와 명예를 높이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한번 매직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새처럼 사쁜히 땅에 내려 앉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환호를 받으라는 유혹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매직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매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기적은 매직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기적은 매직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존중하지만 매직을 거부합니다.
- 예수님은 인기를 위해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자리에는 늘 인간의 고난과 고통, 아픔이 들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나병환자를 고칠 때, 바다의 폭풍을 잔잔히 하실 때가 모두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합니다. 예수의 기적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매직을 요구하는 사탄에 대해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한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를 인용하는 예수님을 향해 사탄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유혹합니다.
여기서 말씀과 말씀이 부딪칩니다. 어떤 것이 옳은 말씀입니까? 여기에 해석학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명기서가 사탄이 인용한 시편보다 더 위대한 말씀이라는 뜻입니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자주의적인 성서읽기는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씀의 본질을 해석학적으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악용합니다. 사탄의 오해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인간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오해합니다. 신앙을 매직으로 저락시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매직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되는 분이 아님을 천명하십니다.
3) 신론의 왜곡입니다:
사탄은 천한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에게 전적인 가치를 두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 역사의 주, 구원의 주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생은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탄은 보는 것에 미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위대함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신학에 너의 삶의 기초를 세우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경배받을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자유를 선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에 대해서도 자유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신성을 갖고 우리의 인격을 굴복시킬 대상은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듣자
11 절: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드니라.
놀랍게도 마가복음 1,13에서는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담과 하와가 지닌 첫 낙원에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III.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이기심으로 아담의 실패가 극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첫 인간 아담의 실패에 대한 엄청난 안티데제입니다.
아담은 에덴의 풍요에서 유혹에 실패했으나, 예수는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첫 인간의 유혹의 질문: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
둘째 인간의 유혹의 질문: 배고품/인기/영광의 유혹
첫 인간의 응답: 말씀에 대한 왜곡과 불순종
둘째 인간의 응답: 말씀에 대한 증거와 순종
첫 인간의 결과: 죄와 죽음과 고통/ 둘째 인간의 결과: 용서와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
예수님이 아담의 실패를 성공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아담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예수님의 승리와 순종과 생명을 지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면, 그렇다면 시험이 없는 곳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인생에 유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대담하게 부딪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하나의 광야와도 같습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앞에 서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사탄에게 유혹받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양자가 우리 앞에 병존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 할 것은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승리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자리에서 이제는 빛과 생명의 자리에로 나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동행하십니다. 예수와 동행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케 하신 것처럼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 모두의 승리입니다. (김 지 철: 장신대채플 2001년 10월 31일)